살후1:11-12. <부르심에 합당한 삶>
– <터 모임을 시작하며>

<한국 교회의 전체적 흐름에 대한 예상 진로> 에 대하여 한숲지기 모임에서 나눈 적이 있다.
<가내 수공업> 단계를 거쳐 한국 교회는 <슈퍼마켓> 정도의 규모를 단 시간 안에 이루어 냈다.

그리고 서울, 경기 지역 을 중심으로 <대형 마트 교회>가 생겨 나기 시작했다.
잘 진열 된 다양한 상품들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 과 조명,시설 (제반 교회 시설) 등을 갖춘 마트 교회는 소비자의 욕구를 -영적 소비자 – 만족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초대형 메가 마트 교회> 들이 생겨 났는데 일반 마트 정도의 생활 권에서 지내던 영적 소비자들이 비교 할수 없을 만큼 업 그레이드 된 편리하고 놀라운 슈퍼 서비스에 (?) 매료 되면서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리는 (교인들의 수평 이동) 급 쏠림 현상이 일어 나기 시작 했다

그러자 작은 영세 슈퍼나 구멍 가게 들은 문을 닫거나 통합 되기 시작하고
브렌 차이즈 형태의 교회들이 (이름뿐 만 아니라 프로그램 까지 동일한 지교회)생겨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도 나도 브렌 차이즈의 레시피를 배우기 위해 몰려 들기 시작해서
각 브렌드 의 학원이 (각종 세미나) 만원 사례를 이루는 일들이 붐처럼 일어 났다.

이런 흐름들이 보이자 다음 단계를 예상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형 메가마트 나 일반 백화점에서 만족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찾아가는 다음 장소는 <명품관> 이라는 것.

즉 중, 저가형 물건을 누구나 편리하게 구입 할수 있는 매장 보다는
quiality 를 보증 받을 수 있으면서도 어느 곳에서나 구입 할수 있는 물건과는
차별화 되고 특별히 자신의 몸에 꼭 맞는 맞춤형 스타일을 사람들은 선호한다는 것.

따라서 앞으로는 분명한 특성과 컨텐츠 를 가진 교회만이 유행의 리더로 자리 잡아 프리미엄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예측 이었다.

– 한국교회는 85%가 100명 미만의 교회이며 어느 교단은 70% 정도가 미자립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현 시점에서 한국교회 의 대세는 대형교회로 보인다.
여기에서 대세라 말함은 <지명도 나 영향력 >인 측면에서 그렇다.

– 이 영향력도 사회 에서의 영향력이기 보다는 한국 교회들 안에서의 영향력을 뜻한다. –

우리는 오늘 이 부분에 대하여 정돈을 해야 한다.

<대형 교회>에 대하여 두리 뭉실 넘어가서는 교회 흐름의 다음 단계로 넘어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소위 의식이 있다고 하는 교인들 가운데는 대형교회에 대하여 긍정적이거나 고운 시선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대형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어느 기관에서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위한 교회 성장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것이 참 아이러니라 생각한다.
성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정작 개척 교회 목회자들을 위하여 성장을 위한 세미나를 한다는 것이.

– 최소한의 미자립 그리고 생존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위한 마음은 이해가 되나
그 기관에서 하는 성장 세미나가 성공하여 개척교회가 큰 교회가 되고
그 교회가 더 성장하여 대형교회가 된다면 그것은 성공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실패로 보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목회를 한다면 교회는 절대 큰 규모로 성장 할수 없다.
대형 교회를 하겠다고 마음 먹고 대형교회를 하는 목회자는 없다.
그냥 열심히 하다 보니 대형교회가 된 것이다.

– 분명 그 과정에서 문제도 발생하고 규모가 크다보니 그 문제가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꼭 대형교회 이기에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교회됨을 가로 막는 문제들은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
이유는 당장 절박하고 여유가 없으며 목회자나 성도나 의외로 상처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크고 작고가 아니라 인간 이기에 발생하는 것 뿐인데 많은 이들은 대형교회 의 탓으로 돌리길 좋아한다.
– 이찬수 목사 같은 경우 대형교회가 되는 것에 대하여 힘들어 하고 고민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 가운데 정말 작은 교회에 대한 소명감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 는 몇 사람이나 될까?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것은 그 같은 마음으로 순수하게 목회하면 또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 나는 작은 교회를 목회하려고 하는 사람이니 다른 교회로 가라! ” 며
찾아 온 교인들을 돌려 보낼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만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목회자는 교만 한 것이다.
목회자 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도 교회의 성장을 꿈꾼다.
만일 그들이 섬기는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여 대형 교회가 된다면 그것을 사양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조건적으로 대형교회를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매도하는 것은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라 보인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교회의 규모와 다양성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그 때마다 적절히 사용하신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쁘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태도다.
만약 무엇인가 대안을 말하기 위한 전제가 앞의 모든 과정을 부정하는 방식이면
그 출발 자체가 비판과 분석 판단의 기초 위에서 시작 하기에 바람직 하지 않다.
상처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워지면 회복도 되고 상처 도 답습한다.

여성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 은 좋은 관점을 가졌으나 그 출발이 아픔과 소외에서 시작되기에
상처 신학 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

교회의 규모 와 상관없이 크고 작은 문제들은 늘 있어 왔다.
이에 대안적 교회들이 생겨 나기 시작했는데 소위 말하는 <건강함> 을 지향 하는 교회다.
상처와 아픔으로 지치고 힘든 많은 성도들이 이 교회들로 인하여 위로 받고 힘을 얻었다.

그리고 <건강함>을 지향하는 수동적 적극을 너머
교회의 본질의 회복과 교회의 사명을 능동적으로 감당하기 위하여
등장한 새로운 교회들도 있는데 전도를 표방하는 전도 셀 교회들 이다.
이 교회들은 건강함을 지향하는 수평 이동을 너머 “ 영혼구원과 제자양육” 에
초점을 맞춘 교회들 이다.
그중 가정교회 가 돗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느끼는 것은 대형 교회의 공소 시효가 끝나간다는 것이다.
역할 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여전히 존재 하겠지만
영향력 이라는 점에서는 약화가 진행되고 있다.
– 요즘 들어 대형교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자꾸 메스컴에 붉어 지는 것은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대형교회의 정화와 개혁과 더불어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새로운 모델>의 교회의 운동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즉 이것은 부정적인 측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 시대의 교회에 관하여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말한다.

20 세기의 화두가 “교회론” 이었다면 21세기의 화두는 “공동체” 다.
그리고 앞 세대의 또 하나의 화두가 “ 하나님을 아는 지식 ” 이었다면
21세기의 화두는 “ 하나님을 경험하기 ” 즉 “ 영성 ” 이다.

초대형교회 인 메가마트 교회를 너머
명품관의 컨텐츠 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 성의 두 가지 명품은
공동체 (교회 혹은 목회) 와 영성 (교회 혹은 목회) 일 것이라 난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게 되어지는 생각은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공동체와 영성> 은 교회가 추구해 야 할 하나의 축이지만
< 영성을 함께 담아 낼 공동체 >와 더불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 각자의 은사와 사명 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역이다 >
– 즉 터 모임을 시작하면서 우리 교회가 추구하려는 교회의 본질은
<영성과 사역의 조화> 가 이루어지는 교회 다.
오늘 본문을 보자.
데살로니가 후서 1장은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승리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바울의 애정어 린 두번째 편지다.
바울은 이런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항상 기도하였는데 오늘 본문이
그 기도의 내용이다.

” 늘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분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여러분의 선한 생각과 믿음의 행위에 그분의 능력을 가득 채워 주셔서

그것이 온전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 (메시지 11-12)

보라.
바울은 그들의 안일과 행복과 번영을 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온전함 – 믿음의 성숙 – 을 위해 기도한다.
바울이 생각한 성도의 성숙 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이 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냥 부르심 이 아니다.

바울의 강조점은 부르심에 합당 한 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한 이라는 단어 안에는

부름심 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부르심 이란 무엇인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는 우리를 이 세상의 죄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회개 의 부르심이다.
즉 우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회개 의 부르심이다.
그래서 내가 주인되어 살던 삶에서 돌이켜 그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부르심 이라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선택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요구 사항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 (요15:16)

그러나 이것 말고 또 다른 부르심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함께 사역 할 사역자 로서의 부르심 이다.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속 해주신 까닭이 무엇일까?
그냥 예수 믿고 천국가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의 일을 함께 하자는 하나의 초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즉 소명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사명 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부르심 즉 소명의 핵심 은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1)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서

2) 사명을 확인하고

3) 순종하여

4)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사명, 순종의 결단, 그리고 보냄 을 받게 된다는 것을 포함하는 의미한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 이라는 책에서

“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결정적으로 부르셨기에
그 분의 소환과 은혜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존재,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가 헌신적이고 역동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데에 투자된다는 진리다 “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의 관심은 우리를 부르신 이에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나님께 날마다 여쭈어야 한다.
‘하나님, 제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해 마음의 귀를 열어놓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라는 말이 아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녀로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하라는 것이다.

지난 여름 정 선교사님은 여러번에 걸쳐서 이 시대의 새로운 모델로서의
사명 인 한숲교회 를 강조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쓰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흐름을 이야기 했는데
바뀐 세상에서 이제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직접 디자인 하시는
<새로운 모델> 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 새로운 모델 > 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우리는 그 어떤 레시피 도 누구와의 비교도 없는 오직 하나님이 주신
생각 만으로 이곳까지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하려는 <터 모임>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터 모임은 이 부르심을 확인 하는 모임이 될 것이다.
– 이것은 자신의 신분 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구원의 확신 )

둘째 터 모임은 부르심의 이유 를 확인하는 모임이 될 것이다, (존재 목적)
부르심의 이유를 우리는 사명 이라 부른다.(엡2:10)
부르심의 이유 사명을 따라 살게 되어 지면 그 인생은 전혀 다른 삶을 살수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향하여 예정하신 일은 우리가 머릿 속에 상상하는
것보다 아니 이제껏 상상했던 것 보다 훨 씬 더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 보다 더 큰 꿈을 꿀 수 없다.

둘째 이 일은 하나님이 계획 하시기에 하나님이 책임 지신다.
그러므로 이 길을 따라사는 자에게는
마침내 인생의 대로가 열리게 된다.
그것을 붙잡는 순간 사막에 길이 생기고..홍해가 갈라지며…여리고 성이 무너지며..
불기둥, 구름 기둥…만나와 메추라기가 끊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 길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이며 성령께서 날마다 여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 난 한숲의 형제 자매들이 이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살길 원한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사명은 반드시 은사와 함께 주어진다.
은사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소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자질이다.
이것이 터 모임의 세 번째 특징이다.
터 모임에서는 사명을 발견하기 위하여 각자의 은사를 찾는 작업을 할 것이다.
은사 라는 것이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자신의 은사를 발견 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그 일을 할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 작업이다.
나는 오늘날 현대 교회들이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중 주된 원인은
모든 성도들이 그들 자신의 은사를 썩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은 사도들만이 은사를 발휘했을 때는 적은 무리가 구원받았지만
온 교회가 각자의 은사대로 섬겼을 때에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졌다고 증거한다.

시작되는 터 모임은
부르심 이라는 확고함 앞에서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잠자고 있는 은사를
불붙게 하시는 경험을 하게 되는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다.
사용하지 않은 근육은 약화되듯이 자신의 은사나 소명대로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퇴보 할 수밖에 없다.

네째 터 모임이 주목하는 시간은 <미래> 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 할 뿐 아니라
앞으로 일하실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는 모임이다.

다섯째
그러므로 터 모임은 다양 해야 한다.
사명을 발견한 삶은 내용적으로 보면 <역동성과 다양성> 으로 나타난다.
각 터마다 다양한 모습이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마침내

“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 예수님의 대 위임에 동참하게 되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난 세이비어 공동체가 우리 공동체의 첫 필독서 라는 것이 지금도 놀랍다.
세이비어 교회는 이처럼 은사와 사명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하나님 나라을 위한 다양한 사역을 감당 하고 있는 가를 보여 준다.

하지만 3년이 지난 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세이비어 교회는 66년 후의 결과라는 것이다.
1947년 오히려 이 교회가 처음 세워 졌을 때의 강조점은 철저한 삶 의 나눔이었다.

시작하는 터 모임에서 매번 사역을 나누고 비전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모임과 달라 보이지 않는 시간 인 것처럼 보여도
중요한 것은 <방향과 마음> 이다.
사명을 찾게 되어지는 것은 방향이 맞고 마음을 알면 언젠가는 찾게 된다.- 속도다.
– 30의 에스겔, 80의 모세 그러나 그들은 결국 찾게 되어졌다.

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는 교회는 많다.
하지만 사역 만큼 영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모델은 많지 않다.

영성이 약해지 면 사역은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가 본격적으로 함께 고민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은
나의 영성 을 어떻게 강화 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를 위하여 터 모임 에서는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선 솔직하고 진솔한 삶의 나눔 으로 시작하 면 좋겠다.
터 모임은 서로가 서로에게 멘토가 되어주는 곳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난3년의 시간은
< 복음 > 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시간이었고
보이지 않는 <진짜 교회> 가 세워 지는 시간이었다.
이제 시작하는 터 모임은 은사와 사명 을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터 모임에 관하여 정돈하면서 기억하고 픈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비전과 사명을 찾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이기심을 빼는 작업이다.

– 스데반은 순교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토록 발견하기 원하는 사명은 세상의 축복이 아니다.
이것을 또 하나의 축복의 방편으로 쓰면 안된다.
그러므로 사명을 구함은 순종 만을 요구하는 겸손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꿈을 찾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기초이며 방법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사명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도구가 핵심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재료다.
하나님은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깊이 경험 할수 있는 어떤 도구(가치, 사명) 를
주셨는가를 찾는 작업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터 모임을 시작하기 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오직 <기도와 말씀> 이었다.
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세워 진다는 것을 철저히 훈련 받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터 모임도 기도와 말씀으로만 세워 질 수 있다.
그리고 더 깊은 영성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함께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난 이를 위하여 <기도와 말씀>을 끝까지 강조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터 모임에서의 치열한 만큼이나 이 목바름을 채우고도 남을
<예배>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기도와 말씀과 예배의 헌신자 들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 이다.
사람의 짧은 인생에서 집중해야 할 그 한 가지 를 (비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최소한의 행위는 어떤 것인가를 고민 하는 것부터.

– 사단은 이러한 것을 싫어한다.
8개월 간의 여정이 쉽지 않았던 이유다.

잘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요한복음 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보내신 분’이라고 지칭한다.
예수님의 생은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 하나로 점철되었다.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은 이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순종의 표상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19:30)이다.
예수의 죽음은 무력한 자의 패배가 아니라, 소명을 온전히 이룬 자의 귀환인 것이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자신을 향한 사명과 은사를 최대한 발휘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터 모임이 되길 소원한다.
삶이 힘겨울수록 더욱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둔 밤을 벗어나는 길은 울면서라도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 가장 유익한 시도는 너무 순수해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정도만 알고 있는 순수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지나치게 지혜롭거나 경험 많은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결코 이룰 수 없다 “
– 세이비어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