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19-30

남서울 산본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목사님이 한결 같이 말씀 하시는 것이 있다.
대형교회의 장 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시점에서 오늘날 필요한 교회는 건강한
교회라는 말씀이었다. 따라서 큰 나무 목회보다는 건강한 중소 교회들이 많이 나와
좋은 숲 교회를 하고 싶다는 것

저는 아프리카에서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또 하나의 개척 교회를 준비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랬다.
개척 교회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보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먼저 질문 했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 있다.
지금 산울 교회가 준비하는 개척은 지금까지,
산울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이라고

건강한 교회는 자연스럽게 출산 (개척) 하게 된 다는 것

자연스러운 출산이 가능한 이유는 그 안에 진짜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진짜라면 단회적인 세포 분열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거쳐 계속해서 진행 될 것이라고.

따라서 지금의 개척을 통해 생명의 유전자가 있음을 확인하고
세워질 교회를 통한 다음의 세포 분열로 이 생명의 역사는 계속 된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이어진 생명의 역사들로 건강한 숲을 이루어 보자고……

2주전 간담회에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셨다.
어떤 목회를 할 것인지? 전 그때 산울 교회와의 연속선상에 있을 겁니다 라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그때 이야기 했던 연속선상 이란 뜻은 다음과 같다.
2000년 교회 역사에 있어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종교 개혁의 역사와 사도 행전의 역사다.

남서울 산본 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산울 교회는
종교 개혁의 역사의 연장선에서 그 가치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귀한 공동체 임에 틀림이 없다.

특별히 제도의 개혁 쪽에 맞추어진 초기의 노력들은
불 필요한 제도만 개선이 되어도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증명 해 주었다.

개척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산울 교회의 좋은 전통인 개혁의 역사를 계속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교회만이 가지는 독특한 제도. 개혁으로의 노력과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에 충실했던 지난 시간 동안의 설교들과
건전한 신학적 가치 위에서 지금까지 중요한 이슈들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나아왔던 것은 우리 교회가 가지는 힘이다.
이어져야 할 종교 개혁의 역사다.

2004년 첫 안식년을 다녀오신 이 목사님께서 우셨다.
안식년이 끝나갈 무렵
하나님은 목사님에게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 너희 교회는 사데 교회다 . 즉 죽은 교회다 ” 고 말씀 하셨단다.
너무 놀라 되 물었지만 ” 영혼 구원” 이 없는 너희 교회는 분명히 죽었다 라고 …

목사님은 그 즈음 이전에 언젠가 강의를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최영기 목사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홍정길 목사님과 더불어 또 한 명의
신앙의 스승을 하나님께서 허락 하신 것으로
감사하면서 가정 교회로의 전환을 선포 하셨었다.

종교개혁의 역사 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역사로서의 부름을 공동체적으로 받는
전환의 시점이었다.

그리고 사도행전 중 산울 교회가 모델로 삼은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6-47

사데 교회 에서 예루살렘 교회로의 변화는 말씀에 순종한 축복의 사건이었다.

난 이런 생각을 한다.
한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말씀을 주신다고.
– 이 목사님에게 말씀 하셨듯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반석에 대한 해석의 여부는 다양 하지만 난 이 반석을 말씀 이라 생각한다,
주님은 한 교회를 세우는 가장 기초석인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 위에 지속적인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 가신다.

하나님은 나에게 사도행전 11:19-30절의 말씀을 주셨다.

즉 하나님이 내 마음에 주신 교회는 안디옥 이다.
안디옥 교회로의 부르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한 가지는 환경과 외형적 측면인데
큰 숲 목회를 지향했던 이 목사님은
분가를 통해 자연스럽게 가정교회가 건강함과 성장을 유지 하는 것처럼
교회 역시 동일한 원리인 분교를 통해 세워져 가야 한다는 생각 이셨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 교회를 기초로 하는 또 다른 분교의 형태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안디옥 교회로 이어지는 것 처럼
사도행전의 역사를 함께 써 간다는 의미에서 귀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더 주목하고 싶은 안디옥 교회의 특징은 내용적인 측면이다.

원래 초기 기독교인들은 모두 유대교인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이외의 모든 추종자들은 유대교인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경험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교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간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예루살렘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있듯이
나사렛파로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지칭하는 정확한 표현은 유대-기독교인이다.
난 한국의 기독교가 유대 – 기독교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외국 기독교의 기초는 이성과 합리였고
한국 기독교의 특징은 고난과 핍박 이었다.

같은 복음이지만 이 복음이 어떤 토양 위에 심겨지는 가는 분명한 한계와
차이를 지닌다.

한국의 기독교는 ,
윤리적 기독교 (유교의 영향)
권위적 기독교 (군대의 영향)
미신적 기독교
문화적 기독교 ( 서양의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 온 기독교 )…….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이름으로 불리며

복음의 분명한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에매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 -기독교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그러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들과 다른 기독교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 공동체였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로부터 복음을 받았지만 점점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 이방인 기독교의 특징은 유대교의 율법과 할례를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초기 기독교의 차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더 벌어진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동생이 주축이 된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는 기독교적 특징을 잃고
결국 역사에서 사라진 반면에, 바울이 중심이 된 이방인 기독교는 큰 세력으로 자란다.

이 헬라 기독교 전통에 속한 누가라는 사람이 기원 후 80년대에 기록한 문서가 바로
사도행전이다.
그가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방인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기독교가 왜 유대교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런 설명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놓여있다.

새로운 교회에 대한 두 가지 소망함이 있다.

한 가지는 이렇듯 유대 기독교에서 (예루살렘) 이방인 기독교로 (안디옥 교회)
의 내용적 변화의 기적 을 간절히 소망한다.

이것을 기적이라 표현한 이유는 ” 개혁이나 치유” 라는 단어로는 되 돌릴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멀리 와 있는 지금의 기독교의 모습과 힘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망함 은 결국 두 기독교의 핵심적인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의 차이였는데

난 예수 그리스도 만이 신앙함의 전 내용 – 구원부터 제자가 되는 전 과정 까지-
임을 고백하는 그리고 확신하는 순수한 공동체에 대한 열망으로
새로운 교회 개척을 준비한다.

나는 ” 개혁 ” 자체에 초점을 두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히려 그 누구도 개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히 선포되고
성도들의 삶이 그 복음 안에서 정직히 반응 하면서
삶의 결과들 이 이 시대의 개혁 이 되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소망한다.

그렇기에 난 종교 개혁의 연속선상에서 복음의 내용과 가치를 지켜 내는 것 뿐 만 아니라
새로운 개척 교회로의 좀 더 근본적인 부르심의 소망은
사도행전의 역사에 대한 갈증이다.

복음의 내용을 넘어선 ” 하나님의 마음” 을 이해 하는 공동체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관심사가 되는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필요함을 안다.
지금까지 나에게 사도행전은 그저 사도행전 이었다.

사도들이 말씀에 반응하고 순종하고
변화되어 가는 그들의 성품과 인격, 동역의 아름다움…..
즉 이 말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나의 주된 관심 사는 사도들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도들의 행전이 아니라
성령 행전인 것을 고백하게 된다.

성령을 능력이나 파워로 이해 하던 한국 교회의 실용적 관점이 싫어
난 인격적 성령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인격적 성령에 대한 이해도
실제적 관계에서 오는 경험이 아니라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성령 행전의 역사를 위해 새로운 교회로의 부르심이 있다는 것을 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에 반응하며 순종하는 공동체
사도행전의 역사가 성령 행전인 것을 보여 주는 강력한 공동체.
인격적 성령과 능력의 성령이 동시에 경험이 되는 공동체.

성령 행전의 분명한 특징은 로고스의 역사가 아니라 레마의 역사였다는 것.

일반적으로 선포 되어지는 로고스의 말씀은 점진적인 시간을 통해 실존적인
신앙인으로의 변화로는 적합한 방식이며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하지만 사도들에게 있어왔던 수 많은 이적과 표적과 기사는
그들이 단순히 말씀 (로고스)만 을 소유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 하심이 동시에 있어 왔는데
그 시점에 일어나는 말씀의 실제적인 역동성을 ” 레마 ” 라고 부른다.

난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을 잘 이해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레마의 역사로 보면 이 사건은 너무나 명쾌한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레마의 역사로 임했던 말씀을 로고스로 이해 했었던 아나니아, 삽비라.

난 개척을 준비하며
새로운 공동체가 레마의 공동체 이길 소망한다.

이적과 기사와 특별함을 원하거나 요구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매 주일 마다 나의 생각, 나의 고민, 나의 관심사가 아닌 하나님께서
공동체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그 말씀을 받는 축복을 받고 싶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붙잡고 구체적인 삶의 정황 앞에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매 순간마다 순종 하기를 원하는 현실에 깊이 뿌리 박은 영성을 소유하는
공동체를 소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레마의 말씀에 반응해 놀라운 축복의 성령 행전을 이어가는 공동체를
기대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궁금하고 듣고 싶어하 는 말들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가정 교회를 합니까?

과연 나의 부름은 가정 교회로의 부름일까?
그리고 드는 생각은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부름은
종교개혁을 넘어 사도행전을 지나 성령 행전으로의 부름이라는 생각을 한다.

중요한 것은 가치와 의미로서의 부르심이어야 하지
일정한 조직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부르심은 될수 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정교회 자체가 부르심의 이유일 수는 없다.

하지만  가정교회라는 형식은 성령 행전으로의 가치를 담아 내기에
아주 유용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산울 교회 와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혼란이 가장 적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특성에 따라 내용이 보완되고 강조점의 포커스가 다를 수 있지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의 가치와 역사가 안디옥 교회를 통해
계속 되었던 것 처럼 새로운 부르심 앞에 선 교회와 공동체는
이 성령 행전의 역사를 계속 써 나갈 것이다.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한 분명한 말씀과 성령의 역사 하심이
지금도 계속 되기를 소망한다.